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금치 전투 (문단 편집) === 전술 === 농민군 지도부는 좁은 우금치 계곡에 농민군 주력을 밀집대형으로 몰아 넣었다. 당연히 이런 밀집대형은 개틀링 기관포의 좋은 사냥감이 되었고, 농민군은 개틀링 기관총의 화력에 피하지도 못하고 쓸려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전술을 마흔 - 쉰 번이나 되풀이하여 무의미한 소모를 늘려 종국에는 공세를 지속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차라리 이런 상황이라면 당장 우금치를 포기하고 인도차이나 전쟁, 베트남 전쟁 당시 [[베트남]]의 베트민이나 베트콩, [[포르투갈]] 식민지 시절 모잠비크와 앙골라, 기니비사우[* 그래도 여기는 남아공의 지원을 받은 포르투갈군의 공세에 밀려 패전 직전까지 갔던 모잠비크, 앙골라와는 달리 포르투갈을 상대로 일으킨 독립 전쟁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어 전쟁에서 우위를 차지했다.]처럼 장기적 [[게릴라]] 전술을 이용해 맞섰다면 최소 밀렸을지는 언정 생존자라도 더 늘릴 수 있었겠지만, 농민군 지도부가 이를 택하지 않고 저런 밀집대형 전술을 고집한 이유가 있었다. 만약 게릴라 전술을 쓰려면 민심에 기반하여 펼쳐야 하지만 전주화약 이후 얼치기 동학도들이 늘어나 동학의 이름으로 약탈이나 행패를 많이 부려서 3남 민심도 1차봉기마냥 동학에게 호의적이진 않았고, 당대 기록에도 동학군들이 민간인들에게 끼친 피해가 심했다는 내용이 많다. * '''지형의 불리함''': 당시 고지에 해당하는 고갯마루는 이미 관군과 일본군이 점거한 상태였다. 동학농민군은 1km에 달하는 오르막길을 아무런 엄폐물 없이 내달려야 하는 입장에 놓여 있었다. 즉 지리적 고지를 못 얻은 시점부터 이미 전술상으로 불리했다. 이후 관군과 일본군이 아직 점령하지 않았던 능선을 점령하는데 성공했지만, 이마저도 40~50차례에 걸친 [[축차투입]] 축차소모로 큰 전술적 패착을 둔 뒤라 별 의미가 없었다. 우금치는 소쿠리나 통발 모양에 가까운 지형이다. 동남쪽만 열리고 양쪽이 다 막힌 형태에 동서 폭이 800 m, 남북 폭이 1,200 m이다. 이렇게 양 측면은 막치고 앞뒤만 트였는데, 그 상황에서 앞뒤 기준으로 가장 먼 거리가 1,200m 정도 되는 지형 안에서라면 입출구 언저리에만 있어도 충분히 소총의 사정거리에 들어간다. 당시 농민군은 그 1,200 m보다 더 안쪽에 들어와 그 '''계곡 안에 밀집대형을 이뤄 돌격'''했는데 오판이었다. 그렇게 4-50번씩이나 밀집대형을 유지한 채 제파공격을 반복하면서 인력은 인력대로 낭비하고, 안 그래도 숫자 외엔 믿을 게 별로 없는 전력을 효과적으로 쓰지 못했다. 이러다보니 안 그래도 밀집대형을 상대하기에 유리한 개틀링을 보유한 관군·일본군 입장에서 농민군을 상대하기에 더욱 유리해졌다. * '''전술 지식 부재''': 농민군은 지도부를 포함한 절대다수가 전문 군인 출신이 아니었다. 특히 신식 무기가 이미 보급된 시점에서 이를 배운 뒤 나온 전문 군인이 아니라 당연히 개틀링이나 신식 소총류의 자세한 정보나 대처법을 몰랐다. 그러다보니 밀집대형으로 화력을 집중해서 정면돌파하는 구식전술만을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농민군 입장에선 분산될수록 화력이 떨어지는 무기로 무장했으니 구식 전술로 치자면 밀어붙이는게 더 유리했지만, '''언덕에 설치한 관군과 일본군의 기관총 앞에서는 과녁에 불과'''했다. 또한 개틀링의 고화력에 대비해 우금치 전투 고갯길 좌우의 경사로 등의 개틀링 화력의 사각지대를 찾고 이를 택해 몰래 이동한다는 전술도 쓰지 않았다.[* [[장성 황룡촌 전투]] 전투에서 장태를 이동 엄폐물로 활용하여 관군의 개틀링을 무력화한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관군은 겨우 300명이 고지 위에 있는 농민군 5천 명을 밑에서 화력으로 몰아붙이다 농민군이 고지에서 장태를 굴려 내려오면서 역습하자 화력이 상쇄되어 근접전을 강요받고 수적 열세로 패한 것으로, 관군·일본군이 고지 위에서 [[니가와]]를 시전한 우금치와는 상황이 정반대다.][* 그리고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이 승리한 것은 그들이 강해서가 아니라 전투 전의 배경이 좋았던 것 때문이다. 그 당시 관군은 기습을 했다지만 병력 수가 적다는 한계가 명확했는데다가 장병 개개인의 화기 숙련도조차 미숙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선 지휘관들은 이를 보완해줄 전술 행위, 하다못해 [[임기응변]]조차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무능했다. 따라서 동학 농민군이 반격을 시도하기 시작하자 관군의 전열이 와해되어 전투가 끝나는 경우가 장성 황룡촌 전투를 포함한 1차 봉기 내내 반복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농민군에게 분명히 이득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문제는 이러한 승리들이 알고 보면 요행에 가까울 정도로 운빨이 심했다는 것을 동학 농민군의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 했다.][* 게다가 동학 농민군이 자신들의 승리가 요행이었음을 눈치 챌 기회가 없는 건 아니었다. 바로 전주성을 점령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에서 관군이 그곳을 다시 탈환하기 위해 전열을 가다듬고 공세를 가하자 성을 내주고 패주한 이후가 그 적기였다. 아무리 병법에 무식한 피지배층 출신들이 구성원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동학 농민군이긴 하나 자신들은 숫자도 많은데다 관군보다가 훨씬 높은 곳에 위치한 곳에서 싸우기 때문에 꽤나 유리한 입장이란 것을 자각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았는데도 패배했다는 사실은 동학 농민군 수뇌부가 심각하게 받아들여야할 사항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이 얻은 승리에만 만족한 것도 모자라서 그것들을 제대로 분석조차 하지 않은채 관군에 대한 맹목적인 증오만 불태우기만 했다. 물론 동학 농민군이 그 사실을 깨달아도 그들이 노획한 신무기조차 제대로 못 쓰고 있는 마당에 이 문제를 극복할 역량을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사치인데다 전주성을 내준 이후 청일 양국의 개입이라는 초대형 사건이 터져서 어찌하지 못했던것도 있다.] 다만 신무기에 발맞추지 못한 전술로 망하거나 대량의 희생자를 내는 경우는 근대식 총포가 개발된 서양권에서조차 [[남북전쟁]] 때 부터 겪은 일이며 1차세계대전의 [[참호전]] 시절엔 극에 달했다. [[참호]]의 요지마다 은엄폐 상태로 거치한 기관총 진지를 제대로 극복하기 시작한건 [[제1차 세계 대전]] 말기쯤 가서야 전술, 무기, 과학의 발전으로 가능해지기 시작했다. 참호나 진지, 건물, 벙커 등에 거치된 기관총의 시선을 정면타격조가 끄는 동안, 우회타격조가 기관총의 사각(死角)으로 침투해 공략하는 전술도 1차세계대전 후반과 2차세계대전에 들어서야 널리 확산되었다. 물론 이것을 바꿔 말하면 당시 최강이었던 서양 여러 국가들의 정규군도 당대에 못 해내고 동학 농민 운동이 진압된 지 20년이 넘어서야 해낸 일을 고작 동아시아 국가의 일개 농민군의 원시적인 무장으로는 애초에 어림도 없던 소리라는 것이다. 상술했듯이 전봉준으로 대표되는 농민군 지도부가 군대 지휘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이 부족했던 와중에, 1차 봉기 때 상대적으로 허술하기 그지 없었던 관군과의 접전에서 밀집대형 공격으로 이겨서 신식 무기들과 개틀링 등을 노획한 경험이 있다보니 지도부는 이를 쉽게 승리의 전략으로 믿어버리는 실수를 범했다. 즉 이 시점에서 동학군 지도부는 한 번 승리했던 전법을 다시금 시도하는, '''초보적인 지휘관들이 흔히 범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게다가 상대는 이전의 관군이 아니었다. 압도적으로 농민군에겐 불리한 신식 무기를 보유했을 뿐만 아니라, 무기를 사용하는 방법도 제대로 숙지한 관군이었다. 그러나 이미 그런 전술이 초기 접전에서부터 손해를 봤음에도 불구하고 지도부가 전략 철회 시도조차 하지 않고 우금치에서 전투를 벌인 이유가 있었다. * 먼저 농민군의 상황도 악화되어서 이대로 물러났다간 사기도 잃고 죽도 밥도 안 되니 성급하고 무모하게나마 우금치 돌파를 성공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컸다. 농민군 측의 수적 우세 때문에 피해가 매우 미미한 관군과 일본군 내에서도 봄~여름이었다면 저 농민군을 상대하는게 어느 정도 힘들었다고 언급한 것이 기록으로 남을 정도였지만, 문제는 우금치 전투가 벌어진 시기는 겨울이었다. 그러다보니 추수 문제를 농민들이 신경쓸 이유는 없었으나 부실한 화력 + 정규군인 적측에 비해 부실하고 미비한 보급 체계와 지원 속에서 추위와 습기(눈)이라는 문제를 함께 끌어안은 채로 농민들이 싸워야 하는 상황이었고, 이는 농민군에게 악재로 작용했다. * 두 번째는 '''우금치만 돌파하는 데 성공하면 전략적 요충지인 공주에 닿을 수 있었기에''' 지도부는 다음을 기약하는 대신 무모하게나마 정면돌파를 감행해서라도 공주를 손에 넣으려고 욕심을 부렸다.[* 겸사겸사 그 당시 동학 농민군의 입장상 우금치를 건너뛰고 다른 루트를 확보해 우회전술을 선택하며 장기전을 노리기도 힘들었다.] 결국 당시 동학 농민군 지도부의 신식 화기 관련 지식&전술 지식과 이를 잘 이용할 수 있는 숙련된 군대와의 교전 경험 부족 + 당시 지도부가 1차 봉기 때의 승리의 기억을 섣불리 자기화 기제로 작용시켜서 전술에 반영한 것 + 우금치 전투 당시 반드시 돌파를 성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조직 내의 압박감과 조직 내 상황 악화로 인해 성급해진 지도부 + 우금치의 지리적 특성상 정면돌파를 해선 안 되는 상황인데도 지도부가 정면돌파를 욕심내게 만든 점이 모두 합쳐진 결과, 농민군은 우금치 정면돌파를 시도했고 패배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의화단]]의 도창불입 신화와 같이 부적[[https://blog.naver.com/dndudwp99/221253737349|#1]][[https://hanshoon.tistory.com/135|#2]]만 있으면 총알을 피할 수 있다는 믿음이 큰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현상은 당시 제국주의 군대와 싸우던 여러 식민지에서 흔하게 보이던 모습이기도 하다. 당장 동학 농민군만 해도 각종 미신 행위를 동원하면서 전투를 치렀고, 여러 식민지에서도 미신을 반영한 주술적 행위를 시전하거나 주술적 물건을 두른 채로 사기를 올려 전투에 참여한 전적이 많다. 물론 상대(제국주의 군대)와의 압도적인 화력차 때문에 보통 실패한 케이스가 더 많지만, 심리적 안정감을 위해서라도 아예 쓸모없는 행위는 아니다.[* 현대 군대도 미신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장병의 종교활동을 장려함으로써 전투의 두려움을 이겨내는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동학농민운동 이후 구한말 시기에 일어난 의병들의 경우 우금치 전투처럼 화력에 밀려 속절없이 패한 경우도 있지만, 지형을 잘 살려 게릴라전, 유격전 등의 전략을 택한 경우에는 뛰어난 전과를 거두기도 했다. 전해산, [[심남일]], [[신돌석]] 등이 이런 전술을 잘 구사하여 명성을 떨쳤지만 결국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의 지리적 불리함과 일제의 적극적인 토벌 공세에 밀려 몰락하기에 이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